본문 바로가기
  • ***꽃삽을 들고 *웃음꽃과 이야기 꽃*을***가꾸고 있는 소담의 작은 화단입니다
♣ 꽃들의 향연 /나의 군시절

아! 서막골

by 소담* 2011. 11. 13.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군대를 갔다온 남자라면

평생 잊을 수 없다는 나의 군 시절이야기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에 내가 근무했던 대대가 있다.

 

내가 근무했던 우리 5중대는 마현리 대대에서 두어시간을 걸어가야 할 만큼

먼 거리인 서막골에 독립중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대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중대도 서러운데 어찌된 일인지 소대 막사까지

100미터간격으로 떨어져 있어서 원치 않은 독립 소대 생활을 해야 했는데.

이렇게 독립중대에 독립소대 생활을 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타가 엄청 심했다. 맞든지 얼차려를 받든지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행사(?) 치러야 그날 밤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었을 만큼 구타는 내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억울한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대가 100키로 행군이 있는 날이면 우리는 대대 본부가 있는

마현리로 두 어 시간을 걸어가서 본부 중대와 합류해야 했다

우리는 이미 두 시간을 더 걸어 왔는데 정작 100키로 행군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행군이 끝날때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이 끝나게 되면 모든 중대가 대대 본부에 집결하여 상황종료에 따른

보고식을 갖게 되는데 이 보고식이 끝나면우리는 다시 서막골로

돌아오기 위해 두 어 시간을 또 다시 걸어 와야만 했다

 

오늘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구글어스에서 서막골을 보게 되었다 .

 

사진을 본 순간 새삼 군 복무 시절 그때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지금은 갈 수가 없는 서막골.

 

아침 기상시간이면 네개 소대가 모여서 연병장에서 점호를 취하는데

말이 좋아 연병장이지 계곡에 있다보니 중대원이 도수체조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청 작았다

 

취사장은 또 얼마나 좁았던가.

일개 분대가  밥 조차도 먹을 수 없을 만큼 너무 좁아서 소대마다 배식조들이

밥을 내무반으로 배달을 해야했다.이렇게 가져온 밥은 고참부터 신참에게 까지

순서대로 주어지는데 우리는 이렇게 취사장이 아닌 내무반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나 밥맛 하나는 끝내 주었다. 다른 부대는 기계로 쩌내는 찜밥을 먹었지만  

우리 중대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워서 직접 가마솥 밥을 지었다.

그러니 어찌 맛이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으려면 고생도 뒤따랐다.

밥을 지으려면 땔나무가 필요했는데 이럴때는 행정반에서 어김없이 땔나무

사역병을 모집하는 방송을 내 보냈다. 여기에는 주로 이등병들이 나갔는데 

취사병들은 사역병들이 해온 나무가 너무 적다고 늘 얼차려를 시켰다

 

이런 수고로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겨울에 위생검열를 받기 위해서는 목욕을 해야 하는데 이 골짜기에

목욕탕이 어디 있겠는가. 위병소 앞 계곡에 억새를 베어다가 

간이목욕탕을 지어놓고 그 안에서 물을 데우는데 여기에는

기름 드럼통이 한 몫을 했다

드럼통을 절반으로 자르면 물을 담아서 데울 수 있는 훌륭한 물통이 되는데 이렇게 만든

물통에 장작불을 지펴서 소대별로 시간에 맞춰 목욕을 해야 했다

말이 좋아 목욕이지 더운물은 고참들이 다 쓰고 졸병들은 늘 찬물에 투덜거려야 했다

 

구글어스에서 바라본 서막골 (사진출처: 7사단 모 카페에서 훔쳐 온 사진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삭제를 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출처를 (미상)으로 남겨 놓았다.)

 

 

위에 실어 놓은 그림은 소담이 근무했던 서막골이다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려올 만큼 철책에서 가까운 곳인데 지금은 부대가

철수를 했는지 막사가 사라지고 쓸쓸하게 빈터만 남아 있다

"서막골"이라고 표시 된 노란색 마크는 막사를 가리키고 있는데 

4개소대의 막사는 각각 100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사진 제일 왼쪽 위에는 탄약고가 그 아래로 1소대 2소대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행정반이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더 조금 내려오면  일개 중대가 모일 수 있는 조그만 연병장이 

그 아래로는 10 여명이 겨우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취사장이 

다시 그 아래로는 화기소대 3소대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꺽여진 부분이 위병소인데 역시 헐리고 없다

 

우리 중대는 이 곳에서 근무하다 최전방 GOP로 들어갔는데

나는 철책에 들어간지 3개월 만에 하사관후보생으로 지명이 되어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부득이 철책에서 빠져 나왔다

 

그 후 하사로 임관이 되어 내가 근무했던 철책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뜻하지 않게 신병교육대 조교로 차출되어 서막골 전우들과는 

아무런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아쉬운 생이별을 해야했다

 

그때의 전우들은 지금 어디에서 잘 살고 있는지 .....

 

아!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그리운 서막골이여.

 




소담이 근무했던 칠성부대의 사단 마크다.
길을 걷다가 우리 부대 사단마크를 달고
있는 병사들이 지나 갈때면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게 된다. 

                                             

                                          < 7사단 사단가 >

1절 신라의 푸른 하늘 태극기 아래
이몸을 함께 바친 젊은 용사들
조국을 사랑하는 일편단심
불이여 바위여라 태산이여라
싸우며 무찌르는 상승 7사단
장병이 기만인가 하나의 마음
2절 창공에 길이 빛날 북두와 같이
천만대 이어 나갈 민족의 터전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업은
무궁화 가지마다 아로 새겨져
벅차고 눈물겨운 투지의 피가
한 송이 꽃잎마다 향기로워라

 

 

 

"꽃삽을 들고"의 실린 모든 글은 "이용허락표시(ccl)"가 걸려 있습니다.

 

다음 블로그 "꽃삽을 들고"의 실린 모든 글은 끝머리 오른쪽 하단에

위와 같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이 표식은 이용허락표시(ccl)가 담겨있으니 주의 하라는 내용입니다.

제 블로그의 CCL은 몇 가지 이용방법 및 조건을 부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래의 저작자를 반드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상업적 이용을 절대 하지마라는 것이며

세 번째 절대 글을 변경하지 마라는 내용입니다

"다음" 블로그 "꽃삽을 들고"의 실린 모든 글은 위와 같이 "이용허락표시(ccl)"가

걸려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일부사진 제외)

이와 같은 일이 지켜지지 않으면 "저작권 침해"가 될 수 있습니다.

 

'♣ 꽃들의 향연 > 나의 군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찾은 7사단 신병교육대  (0) 2015.10.31
더 먹고 싶은데  (0) 2011.11.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