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73356
84184078
이 숫자는로또 번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금복권 번호도 아니다.
군대시절에 분신처럼 따라다녔던 나를 상징하는 번호다.
33073356 이 번호는 훈련병때 처음으로 목에 달았던 군번.
이때만 해도 나는 이 군번이 마지막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사관 후보생으로 차출되면서 새롭게 부여받은 군번.
84184078 그래서 이 숫자는 하사 시절의 군번이다
희한하게도 이 숫자는 기억하기도 싫은데 왜 이리 잊혀 지지 않은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수께끼다.
퇴근 길 차안에서 우연히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방송 내용인즉 요즘 우리 주위에 자기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이 꾀 많다는 것이었는데.
그때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동료가
“아니! 어떻게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하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듯 피식 웃었다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살고 있다니 참 한심스런 사람들입니다.”
차안에서 내렸다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살다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우리 가족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해 보기로 했다
와이프와 딸 그리고 아들까지.순서에 따라 잘 맞아 들어가던 번호가
마지막 아들 전화에서 그만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가운데 번호가 이 번호 인 것 같기도 하고 저 번호 인 것 같기도 하고 헷갈렸지만
마침내 네 자리의 숫자 하나를 모두 기억해 냈다
폰을 열고 조금 전 와이프와 딸의 전화번호를 맞추었듯
기대를 하며 즐겨찾기에 등록된 아들의 전화를 확인하는데.
아뿔싸!
그 숫자는 내 아들의 전화번호가 아니었다.
내가 내 아들의 전화를 모르고 있다니!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이 몽롱해 졌다
차안에서 동료에게 했던 말.
“한심스런 사람들”이라고 했던 그 말이 결국 나를 두고 한 셈이니
내가 나를 생각해도 제 정신을 갖고 사는 것인지
내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이프와 아들, 딸의 가족 모두의 주민번호를 늘 다 외우고 있는 내가 아니었던가.
집으로 돌아왔다.
퇴근하는 나를 깜짝 놀란 듯 바라보는 아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아들아!
너 엄마 전화번호 아니?
아빠는.
누나는.
그때마다 아들은 마치 시험 볼 때 다 알고 있는 문제라도 나 온 듯
술술 잘도 답변했다. 그것도 하나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스킨십이다
나는 얼른 아들을 껴안고 “역시 내 아들이야!” 하면서 힘껏 얼싸 안았는데
그 순간 “헤헤” 까불게 웃는 아들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잠시 후 딸과 와이프가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모녀 둘 다 아들의 전화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역시 나처럼 첫 번째 번호와 끝 번호는 알고 있었으나
가운데 숫자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자기변명이라고나 해야 할까.
네 번이나 바뀐 아들의 전화번호도 문제였지만
진짜 큰 원인은 다른데 있었다.
모두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원터치로 쉽게 전화를 할 수 있는 단축번호와
즐겨찾기에 등록해 버린 번호들이 문제였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가족들의 전화만큼은 기억했어야 했다
마치 군대시절 잊혀 지지 않은 지독한 군번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지도 모른다.
그까짓 번호야 폰에 다 저장되어 있는데 알고 모르고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폰을 잃어버리고 그 후에 벌어질 일은 차후의 일이다
애정 없는 관심은 무관심과 다를 바가 없다.
가족들에 대한 애정은 바로 이 관심 속에서 출발한다.
새삼 퇴근길 차안에서 듣게 된 라디오 오프닝 멘트 한마디에
오늘하루 나를 다시 돌아다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글을 마무리 할 무렵 새삼스레 삐삐가 생각이 났다.
삐삐가 있던 그 시절.
그래도 그때는 가족은 물론 친구들 전화번호도 다 외우고 살았다.
“삐삐” 하고 소리가 울리면 숫자만 보고도 누구누구의 전화인지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이 숫자와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
소담이 총각 때 애지중지 옆구리에 차고 다녔던 삐삐다.
세월이 흐른 지금 삐삐는 창고 안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왔다가 가장 최근에 골동품이 되어버린 비극의 삐삐.
유행가 가사 속에 나오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을 받고 어느 날 우리 곁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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