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난 어느 날
어머니께서 원두막에 놓인 살림살이를 하나 둘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형님이 리어카에 기다란 기둥 네 개와 널빤지, 사다리등
잡동사니를 가득 싣고 왔다
해마다 연례행사 처럼 처서가 지나고 나면 원두막은
이렇게 수명을 다했다
집에 가져 온 재료들은 내년 여름을기약하며
가지런히 묶어서 *더그매와 헛간에 보관을 했는데.
원두막이 사라진 밭은 어떤 모습일까!
아쉬운 마음에 부리나케 밭으로 뛰어갔지만 수박과 참외,
오이넝쿨로 무성했던 밭은 온데간데없고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바닥에는 뿌연 흙먼지만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여름방학 내내 원두막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그때의 풍경들이 사라진 밭을 물끄러미 보노라니
어린 내 마음에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어찌나
마음이 공허하던지…….
밭갈이를 끝낸 다음 날 아침.
수박과 참외가 사라진 밭에는 배추와 무를 심고
바깥쪽으로는 길게 두둑을 내어 메밀을 심었다.
며칠 후
무와 배추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라났다.
씨앗을 파종 할 때 한 구멍에 네 다섯개의 씨앗을
넣는데 어머니께서는 굵고 튼실하게 자란 한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솎아 내었다. 마찬가지로 메밀도
너무 배게 자란 새싹들은 과감하게 솎아내었는데.
이렇게 솎아 낸 배추와 무는 겉절이로 담구었고 메밀
싹은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 된장에 들기름과
갖은 양념을 넣고 조물조물 나물로 무쳤다.
겉절이도 맛있지만 나는 특히 메밀 순이 더 맛이 있었다.
메밀순은 메밀 고유의 향이 있는데 어찌나 부드럽고
맛이 있던지 입에 넣으면 씹을 필요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곧 바로 목으로 넘어갔다.
한편 다 자란 메밀은 9월이 되면 꽃이 피었다
어머님은 메밀꽃을 참 좋아 하셨다.
내 눈에는 한낱 그저 그런 꽃으로 보이건만 어머니는
뭐가 그리 예쁘다고 꽃을 볼 때 마다 웃음을 지으셨는지!
얘야! 메밀꽃은
멀리서 봐야 예쁘고.
달밤에 봐야 예쁘고.
혼자서 봐야 예쁘단다.
어머니의 "메밀꽃 사랑"은 내 머릿속에 한편의 서정시로
곱게 포장되어 남았다
메밀꽃은 신비하고 오묘하다
가까이서 보면 별 볼일 없다가도 멀리 떨어져서 보면
무리지어 핀 꽃들이 마치 소금을 뿌려 놓은 듯 은은하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꽃을 두고 어머니는 왜!
달밤에 그것도 혼자서 봐야 예쁘다고 했을까
소싯적 어느 날!
쟁반같이 둥근달이 휘영청 밝은 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동산 너머에 사는 친척집을 따라 나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은 쏟아지고 어머니의 치마를 잡고 보채기 시작했다.
나의 재촉에 이끌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교교한 달빛이 어찌나 밝던지 어머니는 큰 길을 마다하고
동산을 가로질렀는데 때마침 능선 길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 밭을 만났다.
얘야! 꽃이 너무 예뻐서 집에 가기가 싫구나!
도대체 얼마나 꽃이 예뻤으면!
어머니 나이 서른여덟 살에 아버님이 하늘나라에 가셨다.
풀벌레 소리 요란하게 들려오는 쓸쓸한 밤!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어떠 했기에 어머니는
가던길을 멈추고 그토록 좋아하셨을까!
늘 기뻐도 눈물을 흘리고
슬퍼도 웃음을 짓던 우리 어머니!
그날 밤.
어머니와 나는 메밀밭에서 한 참을 머물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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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그매 : (명사) 지붕 밑과 천장사이의 공간
* 헛간: (명사) 자질구레한 물건을 넣어두는,문짝이 없는 광
* 교교하다: (형용사) 1. 달빛이 매우 밝고 희다 2. 사물이 희고 매우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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